49년만에 간첩 누명벗은 사나이

▲1967년 4월 10일 서울 장충단 공원에서 이수근을 위한 서울시민환영대회가 거창하게 열렸다. 악수를 나누는 여인은 영화배우 최은희이며 가운데 박수치는 남자는 당시의 서울 시장 김현옥이다. 이수근의 나이는 이때 42세이고 다른 두사람은 두살 연하인 40세였던 시절이다.
 

 

< 67년 4월 8일자 대한뉴스>

『판문점에서 극적 탈출로 자유 대한의 품에 안긴 전 북한괴뢰 중앙통신 부사장 이수근씨는 자유 대한의 정치 경제가 발전되고 안정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탈출해왔다고 말하고 북한 괴뢰 경제 건설 7개년 계획은 기술자의 부족과 관리의 모순 그리고 전쟁 준비 관계로 완전히 실패했다고 폭로했습니다. 또 그들은 항상 평화통일을 간판으로 내세우고 있으나 내일이라도 무력으로 남침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북한 괴뢰의 침략 근성을 규탄했습니다.이어 북한괴뢰의 대남 간첩 투입에 대해 (육성 인용)” … 하부로 침투하는 것을 기본으로 둡니다. 인텔리 상층 정치계 인사가 아니라… 하부 침투가 그거이 날짜가 좀 걸리더라도 그거이 믿음성이 있어요. 지주, 자본가들하에서 고충을 당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거기에다 기본을 둔단 말이에요…” 이어 이수근씨는 북쪽에 두고온 가족을 서울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전세계 선량한 어버이들에게 간곡히 호소했습니다.』        
 

<69년 2월 14일 대한뉴스>

『이수근은 간첩이었습니다. 선량한 우리를 악랄하게 속인 이수근은 붉은 이리떼의 앞잡이었습니다. 자유의 땅 조국 대한을 그리워하는 북한 동포의 한사람인줄 알고 설마하던 국민의 눈을 속인 이수근은 간첩이었습니다. 붉은 야욕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교묘한 침투. 그 중 가장 저주할 수단으로 이 땅에 잠입한 간첩 이수근. 전 국민의 환영을 받던 때도 그놈은 간첩이었습니다. 결혼행진곡의 축복속 에서도 그놈은 간첩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머리를 가발로 덮고 코밑에 수염을 달고 여권을 변조해서 북으로 뺑손이치려던 반역자는 잡히고 말았습니다. 악마의 탈을 쓴 민족반역자인줄 모르고 그를 환영했던 선량한 국민들은 이번에는 모두가 격분했습니다. (시민의 육성 인용) “아, 그놈이 그럴 수가 있어요 글쎄, 그 멀쩡한 놈은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저 광화문 네거리에다 내놓고 공개 총살시켜야 마땅합니다.”』

 

대한뉴스는 공보처 산하 국립영상제작소에서 제작해 극장 상영용 기록영화로 틀어대던 영상 관보이다. 이미 오래전에 폐지됐지만 당시 대한 뉴스가 불과 2년도 안되는 시차를 두고 이수근이라는 인물을 놓고 영웅시하다가 반역자로 묘사하며 말끝마다 “그놈은 간첩이었습니다.”를 반복하고 있다.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자유대한의 품에 안긴 최고의 영웅에서 느닷없이 시민의 목소리까지 인용하며 공개 총살을 논할 지경에 이른 것일까. 정제된 표현의 뉴스 전달 네레이션에 ‘그놈’을 되풀이하고 ‘악랄’, ‘이리떼’, ‘저주’등의 격한 감정이 담긴 용어들을 마구잡이로 쏟아내고 있으니 간첩이면 간첩이지 무슨 천인공노할 죄를 지었는지 한번 살펴보자.
 

이수근(李穗根)은 1924년 황해도 서흥군 출신이다. 이곳 출신으로는 국무총리를 지내고 대선에서 두번 고배를 마신 이회창(1935년 ~ )씨가 있다. 이수근은 1946년 조선노동당에 입당해20년간 기자로 잘 뻗어나가 김일성 수행기자까지 거친 후 ‘조선중앙통신’ 부사장이라는 고위직에 오른 대단한 인테리다.
 

얼마든지 호의호식하며 북한 상층부에서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을 그가 판문점에서 수십발의 총알을 피해 남쪽으로 탈출한 이유는 확실치 않다. 아무렴 대한뉴스에서 소개하고 있듯 남쪽 체제를 동경하고 북한 체제에 염증이 나서 온갖 호사스런 기득권을 포기하고 넘어왔을까 의문이며 이런 의문은 합리적인 의심에 바탕한다. 정확하게 찍어서 말할 수는 없으나 북측에서 베겨내기 힘든 큰 과오을 저질렀을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그는 판문점에서 사전에 남쪽 기자에게 낌새를 줬고 유엔군측 영국 준장 세단차에 민첩하게 몸을 던져 정말 영화에나 나올 법한 극적 탈출에 성공한다. 북측 병사들이 마구잡이로 총알을 퍼부었지만 차 뒷좌석에 몸을 웅크리고 구사일생했고 이 장면은 당시 흑백TV시절 수백번도 더 틀어대 대부분의 가정에 TV가 없었어도 지나가다 이웃 잘사는 집을 방문해서라도 눈에 얻어걸리던 모습이었다. 라디오는 아나운서가 숨넘어가듯 자지러지게 소식을 전하기 바빴다. 1967년 3월 22일 이야기다.
 

그런데 이무렵 이씨의 귀순은 박정희와 그의 부하들에게는 큰 호재였다. 63년 대선에서도 간신히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박통은 베트남 파병, 한일협정 등 어려운 난재를 해결하느라 힘들었고 67년 5월 6대 대선을 앞두고 다시 돌파구를 마련해야 재선에 성공하는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북한 최고 엘리트이자 정치적 거물 한명이 자발적으로 탈출해 남한으로 넘어왔으니 북한보다 남한의 체제가 우 월하다는 선전용으로 활용하고 자신의 재선에도 큰 발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부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같은 황해도 동향인이랍시고 아주 살갑게 대했고 차관급 예우에 해당하는 특 1급 자리를 중앙정보부에 마련해 극진히 보살폈다. 하는 일은 주로 지방 순회 반공 강연이었으니 특별한 일거리도 아니었다. 이듬해 9월 대학 여교수와 결혼도 했다. 그렇게 조용히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 져갔고 일반 국민들은 그가 그냥 아무일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그는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 원래가 지식인이었던데다가 자유분방한 성격이라 거의 강제로 앵무새처럼 뇌까려야 하는 반공 연사로서의 강연이 신물이 났던 것이다. 결국 자기는 자유를 찾아왔지만 자유가 아닌 체제 선전용 도구일 뿐이라는 허접한 존재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중정 내부에서도 색안경을 끼고 감시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어 남쪽의 삶에 깊은 회의가 몰려왔다. 하기사 60년대이면 남쪽과 북쪽 모두 체제 우위를 선전하며 아주 험악한 냉전 분위기가 고조되던 때였으니 저쪽이 싫어 탈출했다 하더라도 이쪽도 그리 다르지 않다는 실상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운명처럼 엮게 되는 처조카 배경옥(1969년 당시 29세) – 이름이 여자같지만 남자임– 의 도움을 받아 제 3국으로 탈출하는 계기를 만든다. 중요한 점은 북한이 아니라 제 3국이다.당연하다. 도로 북한가면 반역자로 총살밖에 더 당하겠는가. 스위스같은 중립국에서 글이나 쓰며 사상의 자유를 만끽 하고 싶었던 것이 그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배경옥은 이씨의 북에 있는 부인의 조카로 서울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당시 베트남에 기술자로 있었는데 여동생 결혼식때문에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가 택시에 여권을 놓고 내리는 바람에 여권 재발급을 하던 차였다. 이를 알고 이씨는 배씨에게 이왕이면 자기한테 여권 하나 어떻게 마련해달라고 해서 이모부의 부탁인만큼 여행사를 통해 짝퉁 여권 하나를 마련해 준다.
 

그리고 기회를 노리다가 박통이 중정 초도순시를 온다고 직원들이 혼란한 틈을 타 재빨리 사무실을 피해 조카와 함께 같은 비행기를 타고 홍콩으로 일단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수근의 탈출 사실을 미국쪽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아주 신속하게 한국에 전했고 중정 요원들이 홍콩으로 들이닥쳤다. 홍콩 경찰은 한국에서 도망오고 뒤쫓아오는 이 해괴한 장면을 보고 나름대로 중립적인 태도로 임했다. 중정 요원은 추방하고 정치 망명을 원하는 이수근에게는 캄보디아로 갈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씨는 캄보디아로 일단 가서 준비를 한 후에 안전한 또다른 3국으로 이동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홍콩에서 캄보디아로 가는 비행기가 베트남을 경유해야 했던 것이 이씨에게는 참으로 얄궂은 운명이었다.
 

 

 

 

 

 

 

 

 

 

 

 

 

▲이수근의 구속기소, 사형선고, 사형집행을 알리는 당시 일간지의 보도들. 그러나 기사 내용은 중앙정보 부가 고문 조작해 만들어낸 100% 거짓말에 근거한 황당무계한 내용들로 도배질돼있다.
 

 

중간 기착지인 남베트남 사이공 공항에 머물던 기내에 중정 요원들이 올라타 격투가 벌어졌다. 남베트남 역시 극우 반공 국가라는 점에서 한국과 형제국같은 처지이었으니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이 가능했다. 당시 남베트남 대통령에까지 연락이 가 비행기를 세우고 한국에서 온 중정 요원들이 이수근을 체포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한다. 서울을 탈출한 날이 1월 27일, 사이공 탄손누트 공항에서 체포된 때가 1월 31일이었으니 이수근의 제 2의 엑소더스는 이렇게 5일만에 막을 내렸고 이후는 굳이 묘사하지 않아도 상상이 충분히 갈 것이다.
 

2월 13일 중정은 이렇게 발표했다. “끈질긴 추적끝에 홍콩을 경유, 북한으로 가려던 이수근을 체포했다. 그는 위장귀순자이며 이중간첩이다.” 전부 거짓말이다. 끈질기지도 않았고 북한으로 가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위장일 것도 없고 이중간첩일리는 더더욱 없는 인물 하나가 졸지에 악마같은 반역자로 둔갑되고 있었던 것이다. 딱 하나 맞는 것이 있다면 귀순자인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남쪽으로 오고보니 후회막심인 귀순자였을 뿐이었다.
 

저 발표를 접한 미국CIA는 콧웃음을 쳤다고 한다. 중정 내에서도 조작임을 알고 있는 직원이 후일에 다 고백해주고 있다. 
 

처조카 배경옥도 공연히 한국 들어왔다가 이모부 한번 돕는다고 하다가 공범으로 몰려 11일동안 중정에서 모진 고문을 받는데 전기고문은 기본이며 11일을 단 한숨도 재우지 않고 알몸에 구타와 고문이 반복되자 차라리 죽기를 소원했다고 한다. 배경옥이 이지경으로 고문을 당했으니 이수근은 별도 묘사가 필요없겠다. 그에게는 지옥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중정의 조작된 어처구니없는 증거물 중에는 김일성 앞으로 보내는 암호문도 있었다 . 5월 10일의 1심 판결은 사형을 언도했으며 이에 대해 이씨는 항소하지 않았다. 아마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또 고문을 당하며 목숨 연명하기가 벅차고 정신적으로는 이미 무너질대로 무너져 삶에 대한 의욕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불과 두달이 채 안된 7월 2일 사형이 집행됐다.
 

처조카 배경옥 역시 사형이었다가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그리고 이후 20년으로 감형돼 꼬박 20년 세월의 형기를 다 채우고 89년에 출소했다. 20대에 들어간 사람이 50이 된 나이에 세상에 나온 것이다. 불행하기로 말하면 이수근보다 배경옥이 더 참담했다. 20년 형무소 생활 동안 그의 아내를 비롯한 가족과 친척들은 연좌제로 인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출소 후 어릴 때 보고 한번도 못본 아들이 보고싶어 전화로 만나자고 했더니 아들은 “그냥 지금 살아왔던 대로 사시면 안되겠습니까”라고 하더란다. 억장이 무너져 내리며 아들인들 간첩 아빠를 둔 죄아닌 죄로 얼마나 고통의 세월을 보냈을까를 생각하니 감히 보자고 더 조르지 못했다. 그로부터 얼마 안있어 결혼을 앞둔 아들은 계곡에서 자살을 했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위’)가 이수근 사건을 재조명해 철저한 진상을 조사한 끝에 이렇게 밝혔다. “중정이 이수근을 위장간첩으로 조작해 처형했다. 이 사건은 귀순자의 생명권이 박탈된 비인도적, 반민주적 인권유린 사건이다. …국가는 수사과정에서의 불법 감금, 자백에 의존한 무리한 기소 및 증거재판주의 위반 등에 대해 피해자들과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적절한 후속조치를 취하도록 해야 한다.”


배경옥씨는 과거사위의 이 판정을 근거로 재심을 청구했고 이듬해인 2008년 12월 자신의 무죄 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본인은 간첩 누명을 벗었으나 이모부 이수근은 어찌해볼 수가 없었다. 재심 청구의 주체는 당사자나 직계 가족 또는 검찰이 아니면 불가능한데 당사자는 이미 유명을 달리했고 가족이라고는 앞서 말한대로 풍비박산이 났으니 선뜻 나설 수도 없고 기댈 곳은 검찰이었다. 그러나 이후의 정권이 이명박, 박근혜 정부라 검찰의 전향적 자세를 기대하기 힘들었다. 배씨가 이모부 재심을 검찰 직권으로 해달라고 수없이 청원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이번 정권이 들어서 작년 9월 대검찰청 공안부에서 재심 청구를 했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올해 10월 11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 23 부(김태업 부장판사)는 이수근의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혐의는 무죄라고 확정 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이중간첩이네,위장귀순자네 별별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이수근은 49년만에 간첩의 누명을 벗게 됐다. 그러면 뭐하나, 이 세상에 없는 것을…
 

TV에서 재심 판결이 나오며 빛바랜 흑백 영상으로 그를 다시 불러낸 당시의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울 뿐 아니라 이수근마저도 조작된 간첩이었더란 말인가 생각하니 당시의 정권이 저지른 잔혹성에 치가 떨린다. 차라리 귀순하지 말았으면 불편하나마 나은 삶이었지 않았을까 생각이 깊어지는 우울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