雙曲線 그린 운명의 두 작곡가

▲ 비운의 천재 작곡가 김순남은 얼굴도 꽃미남 이었다. 그가 작곡한 대표적인 작품인 산유화 악보.  
 

 

지난 9월 남한 대통령이 북한 수령을 만나러 평양을 2박 3일 방문했다. 비핵화를 이뤄 미국과의 전면적 관계 개선은 물론 남북 상호간의 경제협력과 군사적 긴장 해소에 관한 진일보한 합의를 위한 방문이었다.


국빈 방문이 항상 그러하듯 상대국 체류 중에 퍼스트 레이디들의 행사도 분주하다. 영부인 김정숙 여사도 여러 시설들을 돌아봤는데 그 중 한 곳에 눈길이 쏠린다. 이름하여 ‘김원균명칭 음악종합대학’(金元均 名稱 音樂綜合大學)이다. 다른 장소야 대략 익숙한 곳들이라 그리 궁금할 것이 없으나 이 기관은 처음 접하는 곳인데다가 대학 이름도 예사롭지 않다.


유일 통치체제하에서 김일성이나 김정일이면 모를까 도대체 김원균이 어떤 인물이길래 북한의 음악대학 앞에 저리 당당하게 그 함자를 갖다 붙였을까. 이번 실협뉴스 교양 상식은 북한에서 추앙받는 작곡가인 이 인물과 더불어 또 한명의 동시대 작곡가였던 김순남(金順男)이라는 인물을 함께 소개하며 운명의 쌍곡선을 그린 두 작곡가의 명암을 대비시켜보고자 한다. 특히 북한에서 최고의 대접과 호사를 누리다가 행복하게 생을 마감한 김원균보다는 김순남의 기구한 생애에 조명을 집중하련다. 둘다 1917년생 동갑이다. 그리고 보니 통영출신의 세계적인 작곡가 고 윤이상 선생도 1917년 생이다. 혼돈의 해방공간 그리고 이후의 살벌한 이념 대립의 한반도에서 쓸쓸히 퇴장하고 잊혀진 비운의 작곡가 김순남을 새삼 떠올리면 이번 남북정상회담이 가지는 의미가 더욱 새로워진다.  


■ 김원균(金元均)


 

설명 필요없이 북한측 자료를 그대로 인용한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꽤나 이런 저런 자료들이 많으나 북한에서의 그의 위상은 북한 스스로가 가장 잘 드러내줄 것이기 때문이다. 자료는 노동(로동)신문 2017년 1 월 27일 기사다. 헤드라인은 『작곡가 김원균 생일 100돐 기념음악회 진행』이라고 뽑고 기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작곡가 김원균 생일 100돐 기념음악회가 26일 동평양대극장에서 진행되였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탓에 자기 의 천성적인 재능마저도 꽃피울수 없었던 김원균은 해방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은혜로운 품에 안겨서야 비로소 참다운 예술창조의 길을 걷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슬하에서 인생의 참된 길을 걸은 그는 우리 당의 주체적 문예사상을 높이 받들고 혁명적 음악작품창작을 위하여 몸바쳐 투쟁하는 과정에 김일성상 계관인, 로력영웅, 인민예술가로 성장하였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당에 대한 고결한 충정과 지칠줄 모르는 창작적 열정을 지니고 절세의 위인, 민족의 태양에 대한 혁명송가와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수많은 음악작품을 창작한 작곡가의 공로를 잊지 않으시고 그의 생일 100돐을 맞으며 기념음악회를 열도록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 영생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 합창으로 시작된 음악회무대에는 혁명적인 명작창작으로 우리 당을 받들어온 인민예술가 김원균의 작품들을 비롯하여 다채로운 종목들이 올랐다.  … 남성합창 《우리의 최고사령관》, 합창 《우리는 천리마타고 달린다》, 혼성2중창과 합창 《사회주의는 우리 생활 우리 생명》 등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령도따라 혁명의 년대마다 승리만을 아로새겨온 우리 군대와 인민의 자랑찬 투쟁행로를 가슴뜨겁게 되새겨보게 하는 종목들은 장내를 무한히 격동시켰다.  …음악회는 관현악과 합창 《애국가》로 막을 내렸다. … 』


그리 길지 않은 스트레이트 기사임에도 김씨 3대의 이름앞에 무슨 접두어처럼 ‘위대한’, ‘경애하는’ 이라는 수식어가 7번이나 반복해 등장한다. 부모에게만 사용하는 단어인 ‘슬하’라는 표현까지 나온다. 사실 기사의 무게는 작곡가 김원균보다는 김원균을 키워주고 보살펴줬다는 김씨 가문을 더 칭송하고 있다. 북한도 이런 투의 기사는 이제 그만둘 때가 되지 않았나?  


여하튼 김원균은 북한의 예술분야에서 대단한 존재다. 일단 북한의 국가인 ‘애국가’를 작곡했으니 (1947년)두말할 나위가 없겠거니와 이보다 한해 전에 김일성을 찬양하는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작곡한 자이다. 위 기사에서도 보듯 음악회가 열리는데 그 첫 곡이 ‘김일성장군의 노래’라 하지 않는가. 원산 출신으로 한국전쟁의 와중인 1952년에 김일성의 지시로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으로 유학을 갈 정도였고 59년까지 긴 유학생활을 하는 특혜를 누렸다. 이후 북한 음악계는 그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종 음악예술 전문교육기관의 장을 도맡았으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한국의 국회의원) 까지 지냈다. 김정일과는 호흡이 잘맞아 많은 창작활동에 둘이 함께 했다. 2002년 85세로 사망했으며 사망 직후 김정일은 즉각 화환을 보냈다.


■ 김순남(金順男)


해방 후 남쪽은 정치적 혼란만이 아니라 문화 예술에서도 이념적 갈등이 컸다. 전체적 지형에서 볼 때 친일 예술인들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비호하에 문화권력을 독점해나가는 가운데 진보 또는 좌익적 성향의 예술인들은 설 자리가 없었고 대대적인 좌익 체포령이 내려지자 월북을 하는 인사들이 많았다.


서울 종로 낙원동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도 다녀온 김순남은 이미 일본의  클레식 음악계에서 대단한 존재로 각인돼 있었다. 그런 그가 해방공간에서 고심했던 것은 우리의 민족 가락을 서양의 화성악으로 오선지에 그려내는 참으로 대담하고도 창의적인 작업이었고 성공을 했다.


일본가락에 쩔어있던 친일계 음악인들이나 아예 창이나 타령조로 돌아가자는 맹목적 복고주의 음악인 들을 모두 물리치고 독보적인 길을 걸었으니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 중 이미 우리 귀에도 익숙한 ‘산유화’ (山有花)라는 작품을 대하면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바로 와닿을 것이다.조수미가 불러 대중화된 이 곡은 김소월의 시로도 유명하다. 지역 특수성과 세계화를 조화시켜 새로운 미적 감각을 창조해내는 일에 성공했을 때 우리는 그런 자를 천재라고 부르는 것이고 그래서 김순남을 한국 현대 민족음악의 시조라 불러 마땅하다.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우리 가락을 담아낸 가곡집이 3권, 남북을 합해 한반도 최초의 교향곡,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으며 수많은 실내악곡에 이르기까지 당대 최고 수준의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다. 해방되자마자 그 시절 사람들이 입에 달고 부르던 ‘건국행진곡’, ‘해방의 노래’, ‘농민가’  또한 그의 주옥같은 작품들이다.


그가 결정적으로 월북할 수 밖에 없었던 작품은 미군정의 실정에 항거한 대구 10.1민중 봉기(1946년)를 기리기 위해 작곡한 ‘인민항쟁가’때문이었다. 북한에서 아직 국가가 작곡되기 전에는 마치 국가처럼 널리 불렸고 남쪽에서도 당시 많이 불렀던 노래였지만 남쪽에서 우익 정권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고 좌익 검거 선풍이 벌어지며 금지곡이 됐고 체포령이 내려진 김순남은 고향인 서울을 버리고 48년 여름에 월북을 하 게 된다. 아까운 음악 천재의 슬픈 운명은 이렇게 시작됐다.


월북하며 혈육인 딸 하나를 서울에 남겼는데 그 딸이 바로 성우, 음악프로 진행자로 유명한 김세원씨다. 아직도 그녀의 촉촉히 젖은 듯 차분한 목소리로 진행되던 ‘김세원의 영화음악실’, ‘밤의 플랫폼’ 등이 귓전에 맴도는 듯한데 평생 얼굴도 못본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살아온 그녀도 어느덧 70을 훌쩍 넘겼다. 지금도 여전히 JTBC예능프로 ‘한끼줍쇼’ 등 방송활동에 열심이다.


월북 전의 유명한 일화 하나. 음악 명문 쥴리어드 스쿨을 졸업했고 당시 한국에서 미군정청 문화담당 참사관을 지내던 육군 대위 일라이 해이모위츠(Ely Haimowitz, 1920 ~2010)는 그의 몇몇 악보를 보고는 경탄을 금치 못하면서 그가 척결의 대상인 좌익계 인물이거나 말았거나 자신의 모교에 그의 악보를 보낸 후 이 자를 받아들여줄 것을 청한다. 쥴리어드 쪽에서도 악보를 보고 비범함을 알아채리고는 입학 허가서를 내렸고 허가서를 받아든 헤이모위츠는 동네 방네 수소문끝에 김순남과 단독대면을 하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아무생각말고 쥴리어드에 가서 몇년만 있어달라고 청을 하는데 역시 천재는 오만이 훈장인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두 사람은 매우 친밀한 우정의 관계였다고 하는데 대위가 본국으로 돌아 가고 얼마 안돼 그도 월북하면서 남쪽에서 얻은 천재일우의 기회는 이렇게 물거품이 됐다. 해이모위츠는 김순남을 일컬어 “조선에서 가장 위대한 작곡가이자 진정한 창조적 천재”라고 평가했다.


북으로 간 김순남은 그야말로 영웅이었다. 앞의 김원균이 북한 국가(國歌)를 아직 만들기도 전에 이미 국가에 준하는 인민항쟁가의 작곡가였으며 정치적으로도 좌익이었으니 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 북한 정권은 그를 평양 음대 학부장에 여러 음악 단체 고위직,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라는 정치적인 자리까지 얹어주며 융숭히 대접했다. 그 역시 한반도 최초라 할 오페라 ‘인민유격대’, 오라토리오 ‘승리’ 라는 대작으로 보답하며 북에서도 정렬적인 작품활동에 전념했다.


북한은 한국전쟁의 와중에 앞의 김원균과 더불어 김순남 역시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으로 유학을 보냈다. 당시 이 음악원에는 쇼스타코비치, 아람 하챠투리안과 같은 당대 최고의 걸출한 작곡가들이 교수로 있었고 하챠투리안은 김순남이 아직 유학 오기도 전에 그의 악보를 보고는 “사회주의의 별이 될 작곡가’라고 극찬했다는데 그의 작품 ‘조선빨찌산의 노래’라는 합창곡을 오케스트라곡으로 편곡해 김순남이 유학오자 헌정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렇게 그는 미소 두 강대국에서 인정한 천재 작곡가였지만 남과 북 양쪽으로부터 버림받는 기구한 운명의 작곡가였으니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까지 유학갈 정도로 잘 나가던 김순남에게 북한 정부는 느닷없이 소환 명령을 내린다.


소위 패전 책임론을 빌미삼은 북한 내부의 권력투쟁의 희생물이 될 참이었다. 북한은 6.25전쟁 후 김일성이 권력을 공공히 하기 위해 라이벌이 될 소지가 있는 리더들을 전쟁 패배 책임과 이후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 차례로 제거 작업에 나서는데 중국 배경의 공산주의 그룹 연안파,소련파, 박헌영의 남로 당파 등은 당시 김일성보다 훨씬 세력이 컸던 그룹들이었다. 그리고 첫 숙청 대상이 박헌영의 남로당 계열이었으며 이 글의 주인공 김순남은 박헌영과 친분이 있었던 것이 화근으로 작용한 것이다. 직전까지만 해도 인민의 영웅이 졸지에 반동부르조아 음악가이자 미제 간첩질을 한 박헌영의 졸개로 매도당하며 바닥으로 추락하게 된다. 당시 소련에 유학가 있던 숱한 사람들이 소환명령에 불응하고 망명을 하는 통에 유일하게 김순남은 태연히 북한으로 들어간 것부터 잘못된 길이었는지 모른다. 남쪽에서 쥴리어드 음대를 거절한 오만하고 비슷한 심리이지 않았을까 싶다.


다른 숙청 대상자도 아니고 천하의 박헌영을 미제국주의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워 처형하는 판에 그와 친분이 있고 남로당 당원이기까지 한 이력을 새삼 들먹이며 숙청시켰으니 재기는 절대로 불가능한 인물이 된 것이다. 판결은 아주 잔인해서 차라리 사형이 더 나을 수도 있었겠다. 예술가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창작활동 금지’였다. 1953년의 소환과 숙청으로 그의 예술가로서의 삶은 딱 그 시점에서 끝났다. 복사 기가 아직 없던 시절 시골구석 어딘가에서 구질구질한 선전선동 노래의 악보 필사쟁이 다시 말해 인간복사기를 하며 연명했다고 하는데 참으로 통탄스러운 천재의 말로가 아닐 수 없다. 그가 도대체 언제 죽었는지조차도 명확치 않다. 60년대에 복권된 것은 사실인 것 같으나 83년 혹은 86년 혹은 60년 대 말에 죽었다는 등 사망연도를 중구난방으로 추정하는 것으로 봐 전혀 존재감없이 살다가 북한에서 그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은 인물로 세상을 뜬 것이다.
 

 

 

 

 

 

 

 

 

 

 

 

 

 

 

 

 

 

▲천재를 알아본 음악인들인 미국의 헤이모위츠와 소련의 하차투리안.


덧없는 이데올로기와 권력투쟁의 희생으로 남북 양쪽에서 잊혀진 비운의 천재 민족음악가 김순남을 새삼 추모하며 이즈음 돌아가고 있는 남북화해무드가 더 앞당겨져 양측의 음악교류가 활발해지고 그의 북한에서의 삶이 있는 그대로 재조명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