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은 날아가고 두꺼비 세상 열리다!

퀴즈 하나 풀고 시작해보자. 세계 증류주 시장에서 소비량 1위의 술은?  
 

하이트 진로의 ‘참이슬’이 1위였다. 이는 세계적으로 공신력있는 영국의 주류시장분석기관IWSR (International Wines and Spirits Record)의 조사에 근거한 자료이며 9리터를 1통(1개)으로 기준해 참이슬이 2017년 한해 총 7,591만 개 판매된 것으로 밝혀졌으며 2위인 태국의 루앙카오(Ruang Khao) 3,175만 개와는 2배를 훨씬 뛰어넘는 차이를 보였다. 참으로 대단한 술, 우리네 소주이지 않은가? 

 


 

 

 

 

 

 

 

 

 

 

 

 

▲보라, 주류 소비 강국 코리아의 위풍당당함을! 진로(1위), 처음처럼(7위), 굿데이(10위) 등 상위 10위권에 한국 소주 브랜드가 3개나 올라 있는데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보드카 스미르노프가 저다지도 왜소해보이더란 말인가.


 

그런데 그뿐이 아니다. 10대 상위권에는 1위의 참이슬 이외에 롯데주류의 ‘처음처럼’이 7위(2,555만 개), 무학의 ‘좋은데이’가 10위(1,855개)를 차지해 3개의 한국 술이 세계 증류주 시장 톱 10에 당당히 고개를 쳐들고 있다. 놀라운 주류 대국의 면모다.
 

그런데 세계 1위의 판매 개수를 자랑하는 ‘진로’(참이슬)는 좀더 명예에 걸맞는 설명이 필요하다. 2001년부터 작년까지 16년간을 한번의 예외없이 1위를 차지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순위의 변동은 있으나 경쟁사인 롯데의 ‘처음처럼’도 10위권에서 한국술끼리의 경쟁으로는 두번째 자리를 차지해왔다. ‘참이슬’은 진로(眞露)를 순 우리말로 옮긴 명칭인데 브랜드 변경에 있어 상당히 괜찮은 아이디어였다고 여겨진다.
 

자, 이쯤 되면  별 걸로 다 국위선양을 하고 있는 우리네 희석식 소주에 대한 역사를 한번 훑어볼 만도 하다. 특히 한국 내에서 진로의 ‘참이슬’과 롯데의 ‘처음처럼’이 소주 시장에서 벌이는 진검승부는 관전 포인트가 충분히 되고도 남을 법 하니 말이다. 오해가 있을까 한마디하고 본론으로 넘어간다. 한국 소주는 물과 감미료 등을 타는 ‘희석식’(稀釋式)이라면서 어떻게 증류주에 분류돼 순위 대상으로 삼았을까 하는 점인데 비록 희석식이기는 하지만 역시 제조 과정에서 곡물을 발효하고 증류하는 작업이 들어가기 때문에 영국 조사기관에서도 증류주군에 포함시킨 것이다. 소비 규모에 대해 놀라는 IWSR은 코리아의 소주 시장이 너무도 거대하다는 반응이다. 본론인 ‘소주의 역사’로 들어가자. 그리고 상, 하 두편으로 나눠 연재한다.
 

학과 두꺼비의 전쟁
 

멀리 왕조 시대에 이르는 소주 제조와 그 실상은 수년전 실협뉴스 교양상식 ‘사라진 전통주, 그 슬픈 운명’ 이라는 제하에서 상세히 소개했으니 바로 20세기로 들어가자. 1924년 평안남도 용강군에 ‘진천양조상회’(眞泉釀造商會)라는 소주 제조사가 있었다. 설립자는 장학엽(張學燁)씨이며 이때만 해도 소주는 100% 증류주였다. 쌀이나 고구마 등을 발효해 끓여 얻는 술,한자 그대로 불사를 소(燒), 술 주(酒) 해서 소주이니 당연했다.
 

이 회사의 당시 로고는 원숭이였다. 아니 뭐라고? 진로의 로고가 ‘원숭이’? 두꺼비가 아니고?하는 분들 많을 것이다. 사실이다. 이 회사가 해방되고 전쟁도 끝난 1954년에 서울로 본사를 옮기며 원숭이가 처음으로 두꺼비가 된 것이다.
 


 

 

 

 

 

 

 

 

 

 

 

 

 

 

 

▲원숭이가 두꺼비로 변했으니 진화가 어째 거꾸로 된 느낌이다.


 

회사는 설립자 장학엽씨가 생존해있던 85년까지는 돈을 쓸어 담았으며 오직 소주 만들기라는 한 우물만 판 장인 기질이 반석같은 회사를 만들어준 것이다. 65년부터 앞에 언급했던 희석식으로 제조 방식을 바 꾸면서 5년이 지난 70년대에 들어서면 당시 소주업계의 황제였던 삼학(三鶴)을 제치고 1위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쯤에서 비운의 대한민국 일등 소주 삼학을 소개하는 것이 도리이겠다. 지금의 브랜드 파워와 시장 점유율 1위를 누리는 진로의 ‘참이슬’같은 존재가 바로 70년대 초까지의 삼학의 위상이라고 상상해보라. 망하기 전까지 전국 점유율 40%였으며 지방에서 서울로 진출해 눈깜짝할 사이에 진로의 아성을 무너뜨리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물론 잠시였지만. 세마리 학이라는 의미의 삼학 소주 제조 회사는 삼학 양조이며 1947년 목표를 기반으로 설립됐다. 첫 동업자로는 우리에게도 꽤나 알려진 인물들하고 연관이 있다. 윤심덕과 현해탄에서 투신해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김우진의 형 김철진, 가수 남진의 부친인 김문옥씨 등이 동업자들이었다. 여하튼 모두 목포가 연고지인 분들로 브랜드명도 목포의 삼학도에서 따온 것이다.
 

삼학의 위세는 처음부터 대단했다. 100% 발효 소주였던 당시에도 그랬지만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쌀로 술을 못만들게 한 정책을 펼쳐 불가피하게 희석식 소주로 바뀔 수 밖에 없었던 이후에도 여전히 삼학은 잘 나갔다. 박통의 정책은 ‘양곡관리법’ 시행을 말하며 세끼 먹기도 힘든 쌀로 술을 만들면 안된다는 나름의 진지한 생각하에 나온 것이고 그래서 한때 혼식이나 분식이 장려되던 때와 궤를 같이 한다. 또한 쌀막걸리 시대도 마감했음은 물론이다.
 

희석식 이전까지 한국에 소주 공장이 무려 500여 곳이 넘었다는데 65년을 기점으로 대규모 자본의 소주 기업 몇개로 압축되는 과정에서 삼학과 진로가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된 것이다. 최 전성기였던 시절 삼학의 월 평균 생산량은 720밀리리터(보통 4홉들이라고 불렀음)기준으로250만 병을 생산했고 법인세 납부 실적이 69년 11억원이었다. 같은 해 진로는 6억원을 조금 못냈으니 2배를 낸 셈이다. 이로써 삼학과 진로의 파워가 어땠는지 실감이 날 것이다. 맛에 대한 평가도 삼학이 확실히 앞섰다. 당시의 어른들 평가는 삼학이 달달하다면 진로는 쓴 맛이 났다는 것인데 쓰던 달던 하여튼 삼학 맛이 더 좋았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에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했던가. 그토록 기세 당당했던 삼학은 그러나 절대 해서는 안될 짓을 하면서 추락했다. 다름아닌 탈세였다. 1971년 11월 납세증지 위조 혐의로 갑자기 혹독한 검찰 수사를 받고 72년, 73년 힘겨운 재판을 받으며 대법원은 탈세액 3억 2,000만원을 추징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결국 세금 체납액도 1억이 넘는 등 재정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부도처리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억이네 3억이네 하니 별 것 아닌 것같지만 당시 200만원이면 괜찮은 양옥집 하나 살 수 있던 시절 이야기다.
 


 

 

 

 

 

 

 

 

 

 

 

 

 

 

 

 

 

 

 

 

▲절대 비운이 아닌 망할 짓 해서 망한 한때 대한민국 국민주였던 삼학의 60년대 시절 병 모습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40년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도 “삼학이 DJ를 정치 자금으로 지원해 박통한테 미운털이 박혀 빡센 세무조사로 망했다”는 소문을 신념처럼 간직하고 있다. 하기사 타이밍이 좀 묘하게 되기는 했다. 하지만 삼학은 더 많은 돈을 벌려는 욕심때문에 납세 증지를 다량으로 위조해 엄청난 탈세를 자행했고 하청업체의 제보에 의해 덜미가 잡혀 정당한 수사를 받고 정당한 댓가를 치른 것이다. 행여 가혹해 보일 수도 있고 하필 연고지가 목포인데다가 DJ로 상징되는 호남에 대한 정치적 차별이 삼학 부도와 맞물리며 저런 소문이 참으로 집요하게 오래가고 있는 것이다.
 

2012년 한 월간지 기자가 이 문제를 확실하게 끝장을 내려고 삼학 사태와 관련한 인물들을 두루 인터뷰했는데 믿을만한 사람들의 믿을만한 증언들이 대부분이라 삼학 폐업과 박통의 핍박 관련설은 사실 무근의 루머라고 확신해도 좋겠다. 예를 들어 삼학의 마지막 오너였던 김상두 사장의 장남 김용환(인터뷰 당시 70세)씨는 “삼학 부도 원인이 DJ에게 정치자금줬다는 의혹은 시중에서 지어낸 얘기일 뿐, 정치권 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다. 운영을 잘못해 망한거다”라고 말했다. 또한 DJ의 장남 김홍일씨도 “우리 도와준 기업 명단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지만 삼학은 우리 도와준 것 없다”고 못박았다. DJ의 가신 중 한명인 권노갑 전 의원도 “만약 삼학 김 사장이 김대중 선생을 지원했다면 6대 국회의원 선거때 표 찍어준 것이 유일한 것”이라는 증언을 한 바 있다. 이 정도면 이제 더 이상 ‘괘씸죄’ 운운하는 것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것이며 더이상 ‘비운(悲運)의’ ~ 라는 수식어는 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여하튼 대한민국의 한때 국민주(國民酒)였던 삼학은 거액 탈세 사건으로 날아가며 만년 2등하던 두꺼비가 70년대 전반부터 소주 시장의 황제로 등극하게 됐다.
 

 


 

 

 

 

 

 

 

 

 

학 떠난 뒤의 두꺼비의 과욕
 

진로 역시 기세좋게 한국 소주 시장을 싹쓸이하다시피 했지만 역시 삼학처럼 과욕이 문제였다. 창업자 장학엽씨가 85년 81세로 타계한 후 2세 장진호씨가 여러 우물을 파면서 문제가 터진 것이다. 한 우물만 파던 아버지와 달리 그는 위스키, 매실주 등 주종의 영역을 확대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식품업, 화장품 (쥬 리아), 전선제조하는 진로산업, 출장연회사업, 진우통신, 건설업(진로건설), 운송업, 금융업(우신상호금고, 우신선물, 우신투자자문), 교육업(우신 중.고교) 등 다 열거하기도 힘들만큼 닥치는대로 인수.합병으로 치달렸다. 당시의 무분별했던 사업 확대를 두고 한 음식 칼럼니스트는 『’주정(‘酒精)에 물 붓기’가 아니라 ‘깨진 독에 물 붓기’』라고 회고했는데 적확한 표현이다. ‘주정’은 화학적으로 말하면 에탄올이며 98% 알콜로 여기에 물을 타면 희석식 소주가 되는 것이다.
 

결국 마구잡이 확장은 자금난으로 이어졌고 1997년 9월 법정관리에 화의 신청을 하고 부도를 내며 도산했다. 채권단의 관리하에 간신히 연명하던 진로는 지난 2005년 하이트맥주에 인수되면서 장씨 일가의 진로 시대가 마감됐다. 그러나 학은 완전히 날아갔어도 두꺼비는 주인만 바뀌고 여전히 살아서 저렇게 통계표에서도 당당히 1위를 자랑하고 있다. (하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