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進 五龍이 나라샤 일마다 甲질이시니

▲ 금탑산업훈장을 받는 故 조중훈 회장. 박정희 대통령과 조 회장은 힘들 때마다 서로 밀어주고 땡겨주는 각별한 사이였다.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의 둘째딸 조현민의 물잔 던지기와 괴성 막말 사건이 지난 4월 중순에 육성 녹음 파일까지 언론에 공개된 후 일파만파로 번지더니 집안 전체의 비리 의혹과 갑질이 끝간 데를 모르고 연일 터져 나오고 있다. 최근에는 밀수질도 밥먹듯이 한 증거가 드러나 경찰과 관세청이 집중 조사 중이다.
 

분노한 대한항공 직원들의 촛불 시위까지 벌어지고 있다. 회장 부부와 세 자녀  다섯 식구의 진상짓 그리고 회장 형제들끼리의 내분까지 접하다 보면 콩가루 집안의 으뜸이다. 이번 교양상식 코너는 남북 정상회담, 북 미정상회담을 능가하는 센세이션을 몰고온 한진그룹 막장 드라마의 기원을 한번 훑어보고자 한다. 창업자 고 조중훈 회장의 전설같은 이야기는 한국 현대사의 한 단면으로 의미도 있으려니와 흥미 또한 쏠쏠하다.
 

한진그룹 창업자 조중훈(趙重勳 1920 ~ 2002).
 

조중훈씨의 집안은 원래 부유했었다. 그러나 부친 사업이 망하면서 당시 휘문 고등 학교를 다니다 말고 진해 해원양성소 기계과에 진학한다. 집안이 망하지 않았으면 일제시대때 지주 자식들이 대부분 밟는 수순인 일본 유학 그리고 귀국 후 전문인력으로 친일하다가 해방 후 큰 자리를 차지하며 정계 혹은 관료 로 승승장구했을 터였다. 하지만 가세가 기운 것이 조중훈 개인과 가문의 영광을 만드는 계기가 됐으니 인간사 새옹지마가 이를 두고 일컬음이다.
 

진해 해원양성소는 후의 해양대학 전신이다. 조씨는 이곳을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기관사 자격증을 따고는 조선소에 근무하다가 수송선을 타고 중국 등 동남아의 바다를 누빈다. 아마 이때 월급쟁이 따위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원대한 사업가 기질을 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1942년 귀국 후 서울에서 이연공업사라는 조그만 기계수리소를 하나 차린다. 트럭이 고장나면 고치는 것이 주업이었다. 그런대로 잘 나가다가 일제 말기인 43년이 되자 기업 정비령이 발포되고 모든 공장들이 업종별로 통폐합되는 과정에서 조씨도 일본 치하 정부(조선총독부)로부터 보상금을 받는다. 이미 일본은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가는 터라 중복 투자된 모든 기업을 통합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전쟁에 필요한 물자의 효율적 관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보상금 받은 돈으로 해방된 45년 11월 트럭 한대를 산 조씨는 인천 항동에 수송 사업을 위한 회사 ‘한진 상사’를 설립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진그룹을 낳은 모태다. 시작은 미미했으나 끝은 창대했더라고 꼴랑 트럭 한대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기에(대한항공) 바다를 누비는 상선(한진해운)에 육로를 쏘다 니는 (한진고속, 한진관광, 한진택배)차량 군단을 거느리는 규모로 커 나갔다.
 

다시 당시로 돌아가 일본 패망 후 주요 항구로 물자들이 몰려 들어오는데 이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유통 수단이 턱없이 부족했다. 조씨의 한진 상사는 거침없이 발전을 거듭해 47년에는 트럭이 15대로 늘어났다. 그밖에 부대사업도 곁들이며 사세를 키워가던 조씨에게 1950년 한국전쟁은 큰 시련이자 위기였다. 하루아침에 사업은 쑥대밭이 됐고 부산 피난 때는 무일푼이 됐다.
 

그러나 조씨에게 전쟁은 재기를 위한 훌륭한 찬스이자 발판이 됐다. 전쟁으로 망했고 동시에 전쟁으로 흥한 매력적인 스토리의 주인공이 바로 조중훈이다. 휴전 후 미국으로부터 전후 복구물자까지 산더미처럼 쏟아져 들어와 수송 사업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던 대표적 인물인 조씨에게는 일확천금을 거둘 천재 일우의 기회를 맞는다. 인천을 기반으로 미군과 계약을 맺으며 운송 분야 최고 실력자로 발돋움하게 된 다. 미군과의 인연에 대한 전설같이 회자되는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겠다. 1955년 여름 경인국도를 달리던 조씨가 부평인근에서 고장난 차를 길가에 세워놓고 도움을 청하는 한 백인 부인을 만난 것은 그의 사업 인생 재기의 결정적 행운이었다. 조씨가 차를 고쳐준 이 여자는 다름아닌 미군 장성 부인으로 그녀의 남편이 고마움을 표시했고 이 장성이 미 8군 요직에 있는 장교들을 재차 소개해 준 덕분에 조씨의 미 군내 비즈니스 인맥은 탄탄하게 넓혀져 갔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비중과 가치는 정말 대단했다. 단적인 예로1957년 군사원조 4억 달러, 주한미군 경비로 3억 달러가 추가 지원됐는데 한국에 대한 이같은 규모의 군사 원조는 유럽 전체 군사원조액보다 매우 높고 남미 국가 전체 군사원조의 4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미국에 달라붙어 한몫 잡은 잔챙이 성공담은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거물들의 성공은 차원이 다르다. 한국 현대사에 밝은 한 미국 역사 학자의 조씨 성공담에 관한 설명을 약간 인용해본다. 『이승만 정권과 미 8군의 젖줄을 차지하는 경쟁에서 역대의 승리자는 나중에 대한항공까지 거느리게 된 한진기업의 사장인 조중훈이었다. 1950 년대 내내 그는 주한 미군과 운송계약을 맺었는데 그 금액은 1960년에 이르러서는 연 간 228만 달러에 이르렀다. 그는 또한 미군으로부터 잉여의 버스도 얻어 서울과 인천 사이의 버스 노선을 개설할 수 있었다.』
 

당시 사업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지프를 몰고 다니며 으스거렸지만 조씨는 한차원 달리 무리를 해서 밴츠를 구해 몰고 다니며 미군 장교들을 만났고 이는 미군측의 신뢰를 얻는데 큰 효과를 봤다. 또, 분에 넘칠 만큼 거하게 지은 자택에 미군 장교들을 자주 초대해 최고의 요리를 대접하고 돌아갈 때는 장교 부인 것까지 선물을 챙겨 보냈으니 이 환대에 녹아나지 않을 장교가 없었다. 심지어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는 어 떤 미군 장교들은 조씨를 붙잡고 추억의 눈물까지 지었다고 하니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이 무렵 한국 국민소득 100달러 조금 넘을까 말까 하던 시절, 조씨는 경이적인 계약체결들을 평소의 로비 덕에 거침없이 따냈고 보유 차량은 500대를 넘어섰다. 그리고 연간 평균 조씨 집을 들락거리며 환대를 받던 손님 수는 누계로 약 500여 명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미군 접대가 곧 그의 사업 전부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겠나 싶다. 살아 생전 조씨가 자랑삼아 직접 밝힌 이야기 한토막이다. 『한창 때인 10년간 우리 집을 다녀간 사람이 대략 5천여 명쯤 됐다. …팬타곤(*미 국방성)에 한국에서 사귀었던 친구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들이 모두 우리집을 다녀갔던 친구들이다.』
 

이런 미군과의 탄탄한 인맥을 바탕으로 베트남전 특수(特需)를 거의 독식하다시피했고 이는 한진그룹을 비약적으로 키운 디딤돌이었다. 남의 나라 처참한 전쟁이 크게는 한국 경제 부흥,작게는 한진그룹의 부흥에 일등공신이었다. 운송 수요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1964년 외환은행 가용 달러 보유액이 4,700만 달러하던 해에 한진은 1억 달러가 넘는 돈을  벌었다.
 

물론 전적으로 조씨의 미군 인맥으로만 된 것은 아니다. 이는 기본 여건이었고 더 결정적인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조씨와 한진을 확실하게 밀어줬기 때문이다. 이미 조씨는 한일 국교수교도 되기 전에 일본 인맥을 동원해 박통이 원했던 2천만 달러 차관도 끌어오는 등 여러모로 수완을 발휘해 박통의 깊은 믿음을 얻고 있었다. 대통령의 조씨에 대한 애정은 대단했다. 미국측이 베트남 운송사업체 선정으로 내건 자격 조건은 보증금 3백만 달러, 트럭 180대, 바지선 등 선박과 지개차 조달 등 약 480만 달러의 자금력이 증명되어야 하며 초기 부대 가용자금까지 고려해 거의 1천만 달러 수준의 자금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 중 6백만 달러는 국가에서 지급보증을 섰다. 이는 어디까지나 박통의 신뢰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나머지 금액은 명동에서 동원한 사채가 해결했다. 정리해보면 일제시대부터 쌓은 일본 인맥, 6.25 전후 복구 시기에 맺은 미군 인맥, 박대통령을 비롯한 국내 정권 실세들과의 깊은 인맥 등 오로지 사람 네트워킹이 빚어낸 성공신화가 바로 오늘의 한진그룹이라고 보면 된다. 사업수완 운운해봤자 그게 다 바로 저 인맥 장사에 포함되는 하위 개념일 뿐이다.
 

조씨는 DJ납치 살해 미수 사건으로 위기에 몰린 박정권의 이미지 실추와 한일 관계의 험악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데 은밀하게 특별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기도 했다. 이 역시 기존의 탄탄한 일본 인맥을 활용 한 덕분이다. 이 작업에는 JP와 일본 수상 다나까는 물론 다나까의 수하들이 엮여 있고 정치 헌금 3억앤 이 다나까 수상에게 전달됐다고 하는데 모두 조씨가 보이지 않게 활약한 스토리다.
 

베트남 전쟁으로 돈을 쓸어담던 조씨에게 행운은 거듭 찾아왔다. 바로 대한항공 인수였다. 물자와 사람을 날르느라 바쁜 와중에 국가 경제정책도 수출 제일주의가 드라이브를 걸고 있었던 터라 항공 수송의 수요는 급증할 수 밖에 없었다. 대한항공의 전신은 대한항공공사(大韓航空公社)였다. 1962년 정부가 출자한 국영기업체였는데 국영기업체가 대부분 그러했듯이 방만한 경영과 주인의식 부재로 부채와 누적 적자가 눈덩이처럼 커져 그 당시 돈으로 30억에 가까웠다고 한다. 결국 민영화시키기로 했고 1969 년 한진이 거의 반 강제적으로 빚을 떠안고 인수할 수 밖에 없었다. 내부적인 반대도 컸고 조씨 본인도 주 저했으나 단호하게 설득한 것은 박통이었다. “해외 나들이때 국적기를 타고 나가고 싶다”, “우리 근로 자들이 우리나라 비행기를 타고 해외를 나가야 자부심을 느끼지 않겠느냐” 등등 나름 애국심에 호소한 것이 조씨의 마음을 움직였고 무엇보다도 부채 상환에 대해 매력적인 특혜를 준 것이 주효했다.
 

인수하자마자 한진은 문자그대로 날개를 달았다. 그야말로 “해동(海東) 조룡(趙龍)이 날으샤~”였다. 초창기 실적만 보면 68년 국내선 이용객 37만이던 것이 인수한 69년 66만으로 그리고 70년에는 100만 가까이 늘었다. 국제선도 68년에 42,000여 명 수준이 69년 80,000 명, 70년에는 24만 명이었다. 여기에 중동 건설 붐이 불면서 대한항공은 순풍에 돛단듯 발전을 거듭한다. 세계 10위권 규모의 항공사 대열에 당당히 명함을 내밀었고 이후부터 한진의 문어발 확장도 본격화됐다.
 

베트남 특수에 대한항공 인수, 여기에 해운업까지 맏으라는 정부의 종용과 지원 특혜 등으로 한진해운까지 설립해버리는데 여기까지는 운송사업을 주력사업으로 키워나간다는 의미에서 크게 문제될 것이 없 었다. 하지만 한국 재벌들의 행태, 즉 돈만 되면 골목 빵집이나 떡복기집까지 초토화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문어발 탐욕은 한진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참치를 잡겠다고 원양어업에 뛰어들고 레저사업, 정보 통신사업, 심지어 부동산 사업에 건설업, 의료사업, 인하대학 등 교육사업, 보험 증권 사업 등 손 대지 않은 업종이 없을 정도의 전천후 사업망을 구축해나갔고 이미 1970년대에 재계 10대 그룹에 진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운송사업의 큰 축 중 하나인 국내 1위, 세계 4위 해운사 한진해운은 2016년 법정관리, 2017년 파산선고를 맞아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렇게 사세 확대만 하면 뭐하겠는가. 내실을 다지고 인간적인 경영문화를 뿌리내리는 것과는 너무나 먼 길을 걸었다. 지나치게 조직적인 군대식 문화, 인격 경시 풍조 만연, 독단 경영, 복지혜택 빈곤 등은 안으로부터 곪아들어갔고 대한항공(KAL)의 잦은 추락 사고는 세계언론으로부터 뭇매를 맞기 일쑤였다. 오죽하면 최근 한 팟 방송에 나온 전직 대한항공 기장은 본인이 비행기 탈 때는 아시아나 항공 탔다는 자조적인 이야기까지 할까. 덩치를 키울 줄만 알고 균형있는 몸매 관리에 무심한 말로는 결국 조중훈 회장이 99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탈세혐의 검찰 소환의 와중에 사재 1천억원을 사회에 희사 하며 일단락됐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02년에 별세했다.
 

 


 

 

 

 

 

 

 

 

 

 

 

 

 

 

 

수송사업으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수송보국(輸送報國)의 전설 조중훈씨의 한국 경제발전에 대한 공헌은 여러 잡음과 특혜에도 불구하고 결코 평가절하될 수는 없다. 여느 재벌가의 발전과 그다지 다른 것도 아니고 한국 경제 토대 구축에 있어 필요악과도 같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던 것은 누구나 다 어느 정도 공감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다만 2세, 3세 경영구도까지 내다보지는 못하고 2세 자식들끼리 원수처럼 지내고 있는 것은 경영인을 떠나 아버지 조중훈으로서도 지하에서 큰 회환을 안고 지켜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제 장남인 현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겸 대한항공 대표이사와 아내 이명희,  두딸 조현아, 조현민, 아들 조원태 등 5명의 가족들이 사내 직원들과 하청업체 직원들에게 행한 패악질은 촛불 시위를 벌이고 있는 대한항공 직원들의 손피켓에 적혀있는 구호가 실감나게 잘 고발해주고 있으니…

“갑질! 어디까지 해봤니?”